과거 형법 제304조에는 혼인빙자간음죄라는 것이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법규정을 살펴보면 혼인을 빙자하거나 기타 위계로써 음행의 상슴 없는 부녀를 기망하여 간음하는 것을 혼인빙자간음죄로 규정하여 처벌하였습니다. 쉽게 말해 결혼할 것이라고 속여서 여성과 성관계를 가졌을 때 해당 남성을 처벌하는 법규정이었습니다.

2009년 11월 27일 혼인빙자간음죄는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을 받아 폐지되었습니다. 언뜻 보면 여성을 보호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형법조항을 폐지한 결정적인 사유는 “여성의 존엄과 가치에 역행”한다는 사유였습니다. 여성을 보호한다는 미명 아래 여성의 성적자기결정권을 부인하고, 이는 여성의 존엄과 가치에 역행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여성은 남자가 결혼하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수동적으로 성관계를 허락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 규정은 마치 혼인을 약속하여 성관계를 하면 죄가 되지 않고, 단순히 혼인을 거짓으로 약속했다는 이유로 성관계를 하면 범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성관계는 단지 그런 요소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님에도 말입니다. 그리고 오직 피해자가 여성이고 가해자가 남성만 된다는 점도 현대시각에서 보면 쉽게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이 역시 성관계의 주체는 남성이고 여성은 수동적인 존재로 보는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이 깔려있습니다.

 

 

그러나 또 이런 점도 생각은 해보아야 합니다. 이론적으로는 앞서 말한 사유로 폐지했지만 만약 내가 그 여성의 입장이라면 어떻게든 상대를 처벌하고 싶은 마음도 들 것입니다. 예를 들어 상대가 미혼이라고 믿고 오래 교제해왔고, 곧 결혼을 하리란 생각으로 성관계도 가졌는데 알고보니 상대가 유부남이었다면? 일단 간통죄는 둘째로 치더라도(현재는 간통죄도 위헌이므로 간통도 처벌은 불가합니다) 이 경우 여자가 입은 상실감은 매우 클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 사유로 혼인빙자간음죄는 폐지되어 상대 남자를 형사적으로 처벌할 방법은 현재로써는 없게 됩니다. 따라서 여성의 존엄과 가치에 역행한다는 이유로 혼인빙자간음죄는 폐지되었지만 과연 그것이 꼭 현실적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여러 가지 의견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이 경우 사기죄라도 되지 않는 것인지 의문을 가지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사기죄는 우리의 상식과 다르게 반드시 필요로 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바로 “재물이나 재산상의 이득”이 필수적인 요건입니다. 즉 거짓말을 해서 남을 속였다고 바로 사기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속여서 돈을 받았거나 또는 그에 준하는 재산상 이득을 취해야만 사기죄가 성립하는 것입니다. 혼인을 빙자해서 상대방에게 돈을 뜯어낸 경우에는 당연히 사기죄가 성립할 수 있음은 논란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혼인을 빙자해 성관계만 가진 경우에 이게 사기죄가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 앞서 말한 재물이나 재산상 이득이 없으므로 사기죄가 되지 않는다는 견해, 그리고 성관계 자체가 하나의 재산상 이득이라고 보면 사기죄가 성립한다는 견해가 있습니다만, 후자의 견해는 일반적으로 타당하다고 보기가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런 경우에 사기죄 역시 성립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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