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정가제란?
어렸을때 학교 근처에는 꼭 슈퍼가 하나씩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편의점도 거의 없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가격을 찍는 바코드도 거의 없었고 그저 슈퍼 주인 아주머니가 불러주는대로 가격을 지불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편의점과 대형마트가 많이 생겨나고, 동네에서 흔히 보이던 작은 슈퍼마켓들은 하나둘씩 자취를 감췄습니다. 대형마트들은 대량의 물건들을 더 싼 가격으로 판매했고 영세한 자영업자들은 이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할 수 없었습니다.
도서나 책은 어떨까요? 만약에 대형 서점이나 인터넷 서점들이 가격할인을 내세워 점유율을 장악하면 동네 책방들이 망하는 것은 눈에 불보듯 뻔한 일입니다. 2003년, 출판및인쇄진흥법은 위와 같이 영세한 동네서점을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도서정가제를 최초로 규정했습니다. 도서정가제란 쉽게 말해 도서를 일정한 금액 수준에서만 판매할 수 있도록 가격을 강제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온라인 대형서점 등이 지나치게 크게 할인하여 동네서점이나 소규모 출판사들이 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지요. 2003년에 시행된 출판및인쇄진흥법의 도서정가제 내용을 요약하면 1) 발매 18개월 이후 책은 무제한 할인이 가능하고 2) 발매 18개월이 안된 책은 최대 10%만 할인이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2014년 법이 개정되면서 커다란 논란에 휩쌓였습니다. 커다란 논란의 중심에 있는 것은 과거 18개월을 기준으로 할인여부를 구분하였던 것과 달리 발매일 관계없이 무조건 최대 10% 이내만 할인이 가능하도록 강제한 부분이었습니다. 이는 소비자 입장에서는 굉장히 열악하게 바뀐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기존 제도에서는 생산자들이 가격경쟁을 하는 구조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소비자들에게는 선택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값싼 가격을 제공하는 업체를 골라 책을 살 수 있었으나 지금은 어차피 어디에서 책을 사든 가격이 똑같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역설적인 문제가 발생합니다. 자본력이 강한 온라인 서점들, 예를 들어 인터파크나 YES24, 교보문고와 같은 서점들은 강력한 유통경로를 바탕으로 값싼 가격으로 책을 판매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세한 서점을 몰락시키는 요인이 됩니다. 대형마트가 등장하면서 동네 슈퍼가 망한 것처럼 말이죠. 그래서 아마도 영세서점이나 소규모 출판업계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이 법률이 개정되었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가격이 같아지면서 소비자들은 더욱 온라인 대형서점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차피 같은 가격이라면 편리하게 온라인으로 쇼핑하고 집앞까지 배송을 받으면 되지, 굳이 동네 서점에서 구입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과거에는 그래도 18개월이 지난 책들의 경우 온라인보다 동네 서점이 싼 경우도 있었고 신간도서가 빨리 들어오는 장점이 있었으나, 지금은 온라인으로 책을 구입해도 당일날 받아볼수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동네 서점에 가서 살 책을 고르고 그 자리에서 핸드폰으로 온라인 주문하는 웃지 못할 세상인 것입니다.
대형 자본을 규제하여 영세업자를 보호한다는 취지 자체는 공감대가 형성됩니다. 그러나 그 방법이 옳으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애초에 대형자본으로부터 동네서점의 몰락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느냐 하는 것도 의문입니다. 왜냐하면 상품의 양, 서비스의 질 등 모든 것이 온라인 서점이 우수한 상황에서 무조건적으로 소비자들에게 동네 서점도 이용해달라고 호소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대형마트를 한달에 2번씩 닫는다고 해서 우리가 재래시장을 이용하진 않습니다. 소비자들은 더이상 그런 1차원적인 바보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단순히 10%로 제한하는 정책은 소비자들에게 더 비싸게 책을 부담해야 하는 상황으로 변질되었을 뿐입니다. 어차피 소비자들은 온라인 대형서점을 이용합니다. 그런데 이 정책으로 인해 과거라면 존재했을 생산자들간의 가격경쟁이 없어져서 더욱 비싼 값으로 책값을 지불해야 할 뿐입니다. 소비자들이 고려하는건 배송시간이나 주문시스템의 편리함 등이지 가격은 일차적인 요인이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E-book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규제된다는 점이 커다란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종이책과 달리 E-book은 원가 측면에서도 훨씬 자유롭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하게 10%밖에 할인이 되지 못하는 가격으로 책을 사야한다는 것은 소비자 입장에서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앞으로의 세상은 종이책보다 E-book의 비율이 더욱 높아지리라는 것은 불보듯 뻔한 일입니다. 이 법이 없었더라면 과거에 더 값싸게 소비할 수 있었던 품목들을 훨씬 비싸게 구매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 정책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정책이 있는 지금, 동네 서점은 몰락했습니다. 이 정책이 없었더라며 동네 서점은 몰락했을 것입니다. 그것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소비자들은 필연적으로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주체에게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정책이 없었더라면 적어도 대기업들 간 가격경쟁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교보문고, YES24, 인터파크는 그들간의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가격경쟁을 하나의 수단으로 활용했을 것입니다. 어떤 곳은 15%, 어떤곳은 20%이상 도서를 할인하여 판매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었습니다. 도서정가제를 통해 오히려 대기업들은 안정적으로 이익을 향유하고 그 비용은 온전히 소비자들에게 전가되고 있는 것입니다. 2020년 11월이 되면 이 법의 연장여부를 검토해야 합니다. 부디 합리적인 해결책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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